(후기등록) 20년 전 헤어진 딸의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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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천복지재단 댓글 0건 조회 1,552회 작성일 20-09-09 12:32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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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헤어진 딸의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고난의 행군, 그리고 탈북
1999년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절, 김이준님(당시 52세)의 가족과 두 딸은 식량 사정으로 기아에서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김이준님은 중국으로 단신으로 탈북하였습니다.
※ 고난의 행군 : 북한이 1990년대 중후반 국제적 고립과 자연재해 등으로 극도의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시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한 구호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힘든 중국 생활과 남한에서의 적응
사실 북한에서 중국으로 탈북한 남성들은 여성들과는 달리 위험하고 나쁘다는 이미지가 커서, 민가의 도움을 받거나 발붙이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겨우겨우 깊은 산골의 농사 일손이 부족한 농가에 간신히 발을 붙이고 농사일을 2년간 하게 되었는데, 본인은 먹고살 수 있으나 돈도 벌지 못하고 더는 북한으로 돌아갈 형편도 안 되어 남한행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이 천 명가량 정도밖에 안되는 초기였습니다. 54세에 입국하여 준고령의 나이에 무엇을 해야 할지 막연하였지만, 남부지방에서 조경사로, 환경미화원으로 2년간 일을 하며 새로운 사회에 적응해가기 시작했습니다.
뒤늦게 찾아온 불행의 소식
그러던 중에 중국 조선족 여성을 만나 국제결혼으로 가정을 이루고, 노후의 직업을 위하여 56세에 요양보호사 자격을 취득하여 65세까지 요양보호사로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일을 하였습니다. 사실 김이준님은 여러 가지 질병이 있었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어서 병원에 가는 것을 미루고 있다가, 혈뇨가 보이자 병원을 찾았고 방광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사실 남한에는 연고도 없고 친구도 없어 많이 외롭고 우울하기도 해서 치료를 포기할까 생각도 했지만, 지역 하나센터 상담사의 지속적인 권유와 딸을 꼭 다시 만나야 한다는 마음으로 치료를 결심하고 항암치료를 시작했습니다.
남한 사회에 정착했지만 여전히 보고 싶은 가족들
작은 도시에서 새벽 첫차로(06:30) 서울아산병원에 가서 항암치료를 하고, 집에 오면 저녁 7시경이 되었습니다. 젊고 건강한 사람도 매일 항암주사를 맞으면서 서울로 출퇴근하려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닌데, 70대 중반의 나이지만 딸의 소식을 들으려면 건강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치료 받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한 시간씩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2차 항암치료의 효과가 좋아 앞으로의 치료도 기대를 갖고 받으려고 합니다.
건강하게 이겨낼 수 있도록 함께 해주세요!
김이준님은 현재 1인 생계비를 지원받고 있고, 아내는 현재 70세로 한국 입국시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 자격을 얻지 못하여, 고령의 나이임에도 간신히 알바를 하며 생활비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항암 치료에는 비용이 많이 들어 걱정이 됩니다. 마지막까지 건강하게 치료받고 이겨낼 수 있도록, 지금도 꿈에 나오는 딸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도움을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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